좋은글

중국철학

행복한파랑새 2006. 7. 5. 01:40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된 사상의 전체. 이것이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그 발상(發祥)이 고대 그리스나 인도와 같이, 극히 오랜 옛날부터 독자성을 가진 전통을 형성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제국(諸國)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특수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중국철학이라는 명칭으로 연구대상이 되나 그 실태는 전통사상에 치중하고 있어, 현대 중국연구는 별도로 행해지기도 한다.

【사상의 성격】 일반적으로 중국사상은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思考)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현실의 실재세계에서 뚜렷하게 분별하는 관념철학으로서의사고는 부족하다. 예컨대 유교사상과 노장(老莊)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전통사상으로서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유교에서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현실과 밀착된 형태에서 사고하였다. 노장에서는 현실의 근저에 있는 도(道) 사상이나 정치사회 밖으로 나가는 은일(隱逸) 사상 등을 보면 마치 초월적인 사고가 행해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역시 개인생활의 평안이라는 현실적인 관심이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에서 전해 온 불교도 그 진여(眞如)의 세계가 본래의 순수한 형태로서보다는 ‘입처즉진(立處卽眞:현실세계가 그대로 진실세계)’이라는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이 현실주의적 경향은 실은 일반적인 감각중시의 입장에서 온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확실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추상적 사고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거부되었다. 이 감각중시의 입장은 과학적·유물론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였다. 개체(個體)의 객관적 관찰보다는 다양한 현상의 형식적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한편으로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강한 감각중시의 경향은 현상의 다양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약을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음양(陰陽)·오행(五行:木·火·土·金·水)에 의한 우주론과 그 밖의 정리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형식 또는 원칙의 존중이라는 경향이 생겨난다. 유교에서의 예(禮)의 존중이 바로 그것이다. 잡다한 현상을 잡다한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면 그 잡다한 현상에 관한 통일의 원리를 추구함직도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형식적 원리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 질서원리와 현실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용된다. 원칙은 원칙으로서 중요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관용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이른바 ‘중용(中庸)’의 사상, 현실에서의 조화(調和) 존중의 사상과 연결된다. 중국사상의 현실주의적 경향을 주축으로 한 성격규정은 이상과 같으며 이러한 사상에서는 신과 악마,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절대적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絶對者)와 개체,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원래 인생론적이고 조화의 철학이며, 예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중국사상에서는 ‘천(天) 사상’도 중요하다. 천은 자연 그 자체라고 생각되었고 권위 있는 명령자·통솔자로 생각되었으며, 또한 우주와 인생을 관찰하는 이상적인 질서원리로 생각되었고, 운명을 좌우하는 근원자(根源者)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존재로서의 천과 사람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국사상의 주류를 차지하는 정통적 경향이다. 이에 대하여, 천을 자연 그 자체로 보고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異端的) 사상이다. 이단사상은 각 시대를 통하여 그 나름대로 강세를 보였지만 정통사상의 광범한 보급에는 결국 미치지 못하였다. 인생론적인 중국사상은 인간의 현실생활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존재의 유한성(有限性)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변천】 중국 사상사의 시대구분은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초(周初)에서 한초(漢初)까지(BC 21∼BC 2세기)로 황허문명[黃河文明]의 정신문화가 순조로운 발달을 이루어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만개(滿開)했던 시대이다. 제2기는 한왕조(漢王朝)의 체제가 확립되어 당말(唐末) 5대까지(BC 2∼AD 10세기)로 왕조체제와 결부된 유교의 권위가 확립되고 마침내 고정화되면서 불교와 도교(道敎)가 대두하게 된다. 제3기는 송초(宋初)에서 청말(淸末)까지(10∼19세기)로 유교가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생명을 찾은 시대이다. 송학(宋學) 즉 주자학(朱子學)과 명학(明學) 즉 양명학(陽明學)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시대이다. 제4기는 청말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세계의 충격에 의해 전통사상이 근본적 변혁을 강요당하게 된다.

〈제1기(고대)〉 중국사상이 그 후의 전통과 같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처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주왕조(周王朝) 초기부터이다. 그 이전의 은대(殷代)의 사상은 그 종교적인 상황을 다소 엿볼 수는 있지만,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조상신(祖上神)이나 잡다한 자연신(自然神)을 중심으로 하여 제(帝)라고 하는 최고의 인격신(人格神)이 있어, 그것이 주초(周初)의 천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은나라 대신 들어선 주나라 사람들은 그 왕조 교대라는 사실을 단순한 무력(武力)의 제압이라 생각하지 않고,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그 근원은 백성을 평안케 하는 왕자(王者)의 덕(德)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우 천은 그래도 종교적·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덕이라는 인간 문제에 치중하여 생각하는 점에 이미 중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색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 종교의례를 인간적·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상응하는 것으로 마침내 춘추(春秋) 말기의 공자의 유교가 탄생하였다. 공자도 또한 천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내면의 윤리적인 문제로서 공자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말한 것이어서 주초에서처럼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니었다. 공자의 최대 관심은 인간세계의 새로운 질서 수립에 있었다. 춘추시대까지의 사회는 혈연적 일족(一族)으로 지켜진 세습적 영주(領主)가 중심이 되었으나, 말기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 해체되기 시작하여, 경지(耕地)와 농민을 확보한 새로운 지주세력이 옛 영주를 뒤엎는, 이른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가 되었다. 이 세력은 일반 민중의 대두를 촉진하고, 따라서 활발한 사상의 개화(開花)를 위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공자는 우선 이 혼란한 사회를 혈연의 연대의식에서 배운 새로운 도덕질서에 의해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인(仁)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이어 나타난 묵자(墨子)는 겸애교리(兼愛交利) 즉 나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애(家族愛)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임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 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적·형식적인 법의 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었다. 순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제2기(중세)〉 한제국(漢帝國)의 지배이론은 동중서(董仲舒)의 유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신비적인 음양사상과 결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계의 사건과 자연계의 변이(變異)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천의(天意)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을 수식하였다. 유교는 여기에 신비적인 색채를 가하여 한왕조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화(化)한 사상은 부질없이 신비적·미신적 경향을 조장하였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사적(意思的)인 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 생각하여 미신타파에 노력하였으나 그 비판적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권력이 붕괴되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장사상이 번성하게 된다. 3∼4세기의 위(魏)·진(晉) 시대에는 유교적인 예교(禮敎)에 얽매인 신사를 이[]에 비유하거나 사관(仕官)을 떳떳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높아, 유교의 성격도 한대(漢代)와는 다른 자유롭고 절충적인 것이 되었다. 노장의 도사상은 마침내 불교의 이해를 도와 특히 반야(般若)의 공사상(空思想)에 관한 깊은 철리(哲理)를 깨닫게 되어 현실적인 중국사상도 이 인도사상과의 교류로 더욱 폭을 넓히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변적(思辨的)·피안적(彼岸的) 불교는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수(隋)·당(唐)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화엄(華嚴)·선(禪), 그 밖에 중국불교의 제파(諸派)는 모두가 피안보다 현실을, 번잡한 것보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것을, 사변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노자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었으나, 종교사상으로서는 저속한 것이었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와서 한유(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復古的)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제3기(근세)〉 송대(宋代)에는 정치의 중심적 담당자가 세습적인 귀족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 신흥(新興) 인재들이었다. 사상계가 활발해진 것은 이런 사실과 관계가 있다. 당나라 한유도 이러한 신흥 인재였다. 여기서는 불교의 철리에 대항하여 유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확립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그것은 송학 또는 이학(理學)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 그리고 장횡거(張橫渠) 등의 사상가에 의해 이(理)의 철학, 기(氣)의 철학 또는 화엄(華嚴)의 철학을 응용한 근본의 이와 현상을 일치시킨 철학 등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인생철학, 특히 심성(心性)의 이론이 발전하여, 그것들이 마침내 주자(朱子)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주자학(朱子學)으로, 우주 존재의 근본은 태극(太極)으로서의 이(理)라는 설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상(現象)하기 위해서는 기(氣)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세계는 이와 기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인간에 있어 이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선(善) 그 자체이지만, 기는 그 물질성에 의해 정욕(情欲)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이 인욕(人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발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심성을 가다듬어 내성(內省)하는 동시에 내외를 관철하는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계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한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방법을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자학의 흐름 외에 북송의 구양 수(歐陽修)의 실증주의나 왕안석(王安石), 남송(南宋)의 영가학파(永嘉學派) 등에서 볼 수 있는 실리적 공리주의 사상 등도 있었으나, 송대는 대체로 보아 존재의 근원과 심성의 본질을 생각하는 내성적·사변적 사상이 지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육상산(陸象山)의 심학(心學)이 있다. 그 사상은 마침내 명대(明代) 중기의 왕양명에게서 완성되었다. 주자에게서는 이가 외계의 사물에도 객관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왕양명에게서는 심(心)이 바로 이(理)로서 심 외에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을 인지(認知)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그 지(知)는 행(行), 즉 체험을 통해서만 확실해진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나 정치의 질서 원리로서만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지(良知)를 이루다’ 즉 본래적인 심정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 그러기 위해 ‘사상(事上)에서 마련(磨練)한다’고 하는 수양론(修養論)에 의해 양명학은 완성되었다. 명말(明末)이 되면서 이 주관적 경향은 한층 심해져 이탁오(李卓吾)처럼 인욕(人欲)을 긍정하고 거짓 없고 솔직한 동심(童心)을 존중하여 기성질서에 반역하는 사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양명학의 실천적 면을 이어받아 17세기 명말 청초(明末淸初)에는 일종의 실학적 경향이 활발하였다. 황종희(黃宗羲)나 고염무(顧炎武)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 경향은 청조(淸朝)의 한인(漢人) 압박으로 세력을 잃고 훈고고증(訓考證)의 학술로 바뀌어 사상계에서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제4기(근대)〉 중국은 아편전쟁(1841∼42)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상계에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은 공양학파(公羊學派) 사람들이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이론을 재생시킴으로써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는 개혁사상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변격이론(變格理論)으로서 청·일전쟁(淸日戰爭:1894∼95) 후의 캉유웨이[康有爲]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침입은 한편 중국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문물을 이용함으로써 복리를 얻으려고 하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일으켰는데, 또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양하여 멸만흥한(滅滿興漢)의, 혁명사상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하여 오랜 왕조체제에서 민국(民國)으로 전환하는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2)을 맞이하게 되며, 그 지도자 쑨원[孫文]은 최초의 서양적 사상가이다. 그의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확실히 데모크라시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다. 이러한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중국사상은 봉건적 사상이라 하여 이제 통렬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5·4운동(1919)의 문화혁명 시기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마오쩌둥[毛澤東] 이 후의 상황은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위에서 말한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사상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 사상은 지금도 강하게 존속하며, 또한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다.


1. 유교


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중에서 옛 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벌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고,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야 한다.

儒學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 통상 유교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나 원칙적으로는 유교를 성립시키는 학문이며 교학적(敎學的) 의미가 짙다. 실천적 도의(道義)에 입각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본지(本旨)로 삼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준봉(遵奉)하는 학문이다. 공자가 죽은 후 맹자는 인의(仁義)를 내세워 성선양기(性善養氣)를 설하는 동시에 인정(仁政)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예(禮)를 주장하여 성악설을 내세우는 동시에 권학(勸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전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 이 학문은 쇠퇴하였다. 다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소멸하는 듯하였으나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러 다시 부흥하여 교학으로서의 태세를 갖춤으로써 유학이 성립되었다. 국학으로 채택되어 정치적으로 지지를 받는 체제 속에서 유지되어온 학문으로 전한(前漢)시대에는 경세치용(經世致用:정치적 실용)의 학문으로, 후한(後漢)시대에는 훈고학(訓學)으로 발달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정의(正義)의 학으로, 송(宋)나라 때에는 성리학(性理學:朱子學)으로, 명(明)나라 때는 심학(心學), 청(淸)나라 때는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한 고증학(考證學)으로 변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관습적인 사회 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한대 유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논어·맹자·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유교의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교감(校勘)·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유교】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우탁(禹倬)·권부(權溥) 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이귀(李貴)·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물(物)·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孔子(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論語

중국 유교(儒敎)의 근본문헌(根本文獻).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으로, 공자와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있게 기재되었다.

【명칭과 편자】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자유(子游)·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에서 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한 것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전반(前半) 10편을 상론(上論), 후반을 하론(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립】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노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127~200)은 이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내외의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성립까지의 전승계통(傳承系統)을 탐색하는 한편 한(漢)나라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지 않았다.

【내용】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공자 본래의 가르침을 전하는가가 문제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논어가 불가결한 문헌임에는 틀림없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축성이 깊고 문장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이다.

【전래】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 지식인의 필수 서책이며,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古註라고도 한다)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孔孟思想)에 의한 집주 통일화(集註統一化)가 이루어졌고, 특히 주희(朱熹:1130~1200)가 《사서(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新註라고도 한다)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에 대체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구문화(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공교(孔敎)·논어 비판이 행하여졌고,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미국에 특히 많다.


孟子(BC 372?∼BC 28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 출생.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孟子』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맹가(孟軻)의 저술.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인 주희(朱熹)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희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 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中庸』

중국 유교 경전의 하나.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 알려졌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있는 이 송(宋)나라 때 단행본이 된 것으로,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로 불리고 있으며, 송학(宋學)의 중요한 교재가 되었다. 여기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다.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은 요컨대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誠)일진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 성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라고 하는 주석서(注釋書)를 지었는데, 여기서 주자는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을 위해 《중용》을 썼다고 말하였다.


『大學』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중 중요한 경서(經書).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던 것을 송(宋)의 사마 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다. 그 후 주자(朱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經) 1장(章), 전(傳) 10장으로 구별하여 주석(註釋)을 가하고 이를 존숭(尊崇)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주자는, 경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記述)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지지선(止至善: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하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8조목(八條目)으로 정리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실천과정으로서는 8조목에 3강령이 포함되고, 격물 즉 사물의 이치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평천하의 궁극 목적과 연결된다는 것이 대학의 논리이다. 전은 경의 설명이라는 뜻이다. 주자는 본문에 착간(錯簡)과 오탈(誤脫)이 있다 하여 교정하고, 또 ‘격물’의 전을 보충하였다.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주자학을 비판하면서부터 주자의 《대학장구》, 특히 그 보전(補傳)은 유학자간의 논쟁(論爭)의 중심문제가 되었다. 왕양명은 대학고본(大學古本)에 의거하여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지었다.


『禮記』

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 49편(編). 오경(五經)의 하나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라고 하며 《의례》가 예의 경문(經文)이라면 《예기》는 그 설명서에 해당한다. 그 성립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공자(孔子)의 제자를 비롯하여 한(漢)시대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된 《예기》 200편 중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곡례(曲禮)·단궁(檀弓)·왕제(王制)·월령(月令)·예운(禮運)·예기(禮器)·교특성(郊特性)·명당위(明堂位)·학기(學記)·악기(樂記)·제법(祭法)·제의(祭儀)·관의(冠儀)·혼의(婚儀)·향음주의(鄕飮酒儀)·사의(射儀) 등의 제편(諸篇)이 있고, 예의 이론 및 실제를 논술한 것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 《중용(中庸)》도 이 중 한 편이다. 《예기정의(禮記正儀)》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의 주(注), 당(唐)나라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로 되었으며, 《예기》의 주석서로 통용된다.

荀子(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D)’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荀子』

중국 주(周)나라 때의 유학자 순자(荀子:荀況)의 사상(思想)을 집록한 책. 처음에는 《손경신서(孫卿新書)》라고 하였다. 현본은 20권 33편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12권 322편이던 것을 한(漢)의 유향(劉向)이 중복을 정리하여 32편으로 만들고, 다시 당(唐)나라 때 양량(楊倞)이 20권 32편으로 개편, 주(注)를 달고 서명을 《손경자(孫卿子)》라 개칭하였다가 후에 《순자》라고 간략히 불리게 되었다. 문헌학적(文獻學的)으로는 편(篇)의 순서에 따라 수신파 전승(修身派傳承)이 6편, 치국파(治國派) 9편, 이론파(理論派) 6편, 나머지는 순자 문인들의 잡록(雜錄)으로 유별할 수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권학(勸學)·예론(禮論)·성악론(性惡論)이 중심을 이룬다. 공자(孔子) 이후 맹자(孟子)에 의하여 정비된 유교는 내면적·주관적인 입장만이 강화되었으므로 순자는 이에 반대하여 공자의 예(禮)의 사상을 내세워,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객관적 입장에서 유교를 재정비하였다. 먼저 공자나 맹자에서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천(天)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늘은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연의 천공(天空)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하늘과 사람과의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독립선언으로서는 귀중한 뜻을 지녔으나 유교의 전체적 역사에서 볼 때는 이단적(異端的)이었다. 독립된 인간의 존엄성은 예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으로, 예는 순자의 경우 성인(聖人)이 정한 사회규범(社會規範)으로 뚜렷한 객관적 형식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것만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가치도 발휘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수양(修養)은 맹자와 같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선(善)으로 보아 그 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며 예의 형식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후천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즉, ‘인성(人性)은 악(惡)’이며 ‘날 때부터 이(利)를 좋아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방치하면 쟁탈(爭奪)과 살육이 발생하기 때문에 악이라는 본성을 교정(矯正)하는 ‘사법(師法)의 가르침과 예의의 길’인 위(僞:人爲)에 의해서만 치세(治世)를 실현할 수 있다 하여, 여기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는 성악설(性惡說)이 태어났다. 송대(宋代) 이후 이 성악설과 천(天)·인(人) 분리설로 인하여 이단시되어 왔으나 그 논리학이나 인식론을 포함한 사상의 과학적 성격은 한대(漢代) 유교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의의와 함께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墨家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의 사상가 묵자(墨子)를 계승하는 학파. 그 사상과 학설은 《묵자》 53편(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장(節葬)·천지(天志)·비락(非樂)·명귀(明鬼)·비명(非命)등 10론(論)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유가(儒家)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 이 집단은 거자(巨子)를 지도자로 하여 강력한 단결을 자랑하였으며, 그 기반은 지연공동체적인 농촌에 있었다. 묵가의 사적(事績)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대의 거자로서 금활리(禽滑釐)·맹승(孟勝)·전양자(田襄子) 등의 이름이 전한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顯學編)에 의하면 묵가는 전국 말기에 3파로 분립되었다고 하는데, 《묵자》 10론 하나하나에 내용이 대동소이한 상·중·하편(編)이 있는 것은 그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탄압을 받은 이후 쇠미해지다가 전한(前漢) 무제(武帝)에 의한 유교일존(儒敎一尊) 정책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墨子(BC 480∼BC 390)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 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절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法家

법치주의를 제창한 중국의 정치 사상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一群)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이다. 특히 유가(儒家) 사상과의 대립·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秦)·한(漢)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한서(漢書)》 에 의하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刑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다. 위(魏)나라의 문후(文侯)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李:BC 455?∼BC 395?),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商:?∼BC 338),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秦始皇)을 감탄시킨 한비자(韓非子:?∼BC 233), 진(秦)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李斯:?∼BC 210),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錯:?∼BC 154), 무제(武帝)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桑弘羊:?∼ BC 80)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이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韓非子(BC 280?∼BC 233)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韓)의 왕족으로, 젊어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대성하였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 되었다. 진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孤憤)·오두(五)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한다. 한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누히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유저에 《한비자(韓非子)》가 있다.


『韓非子』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280?∼BC 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와 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신자(申子)·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등은 오래된 것이고,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陰陽五行說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즉, 음양이란 사물(事物)의 현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라고 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두 개의 기호에다 모든 사물을 포괄·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인 본질(本質)을 양면으로 관찰하여 상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이원론적(二元論的)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오행은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원기(元氣), 곧 목·화·토·금·수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오행의 상생(相生)·상극(相剋)의 관계를 가지고 사물간의 상호관계 및 그 생성(生成)의 변화를 해석하기 위해 방법론적 수단으로 응용한 것이다. ① 오행상생(五行相生):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는 관계이며, 곧 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금생수(金生水)·수생목(水生木)이 된다. ② 오행상극(五行相剋):상극에는 억제(抑制)·저지(沮止)의 뜻이 내포되었고, 그 상호관계는 목극토(木剋土)·토극수(土剋水)·수극화(水剋火)·화극금(火剋金)·금극목(金剋木)으로 되었다.

【한방의학과 음양오행학설】 〈한방의학의 철학적 배경〉 음양오행학설은 한방의학의 중요한 기초이론이다. 한방의학의 자연관(自然觀)과 인체의 생리(生理)·병리(病理)에 대한 원리·진단·치료·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이는 한방의학의 발상지인 중국의 고대 의학자들이 음양오행학설을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인체와 음양〉 음양을 인체에 적용시켜 보면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장(臟)은 음에 속하고 부(腑)는 양에 속한다. 인체의 생리기능상 혈압상승, 분비액의 증가 등은 양적(陽的) 현상이며, 혈압강하·분비액의 저하 등은 음적(陰的) 현상이다. 인체에서 이 음양의 조화가 깨어지면 병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한방의학은 양과 음의 과다(過多)와 부족을 조화시켜 깨어진 음양의 균형을 되찾도록 해주는 치료학이라 하겠다.

〈인체와 오행〉 한방의학에서는 오행의 생극(生剋)의 이치를 운용하여 인체에 있는 내장(內臟)의 상호자생(相互資生)·상호제약(相互制約)의 관계를 설명하며, 오행의 귀납법(歸納法)으로 인체의 각 부위간(部位間)의 상호연관을 설명한다. 인체는 오장(五臟), 즉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과, 육부(六腑) 즉 담(膽)·위(胃)·소장·대장·방광·삼초(三焦),오체(五體) 즉 피모(皮毛)·기육(肌肉)·혈맥·근(筋)·골수(骨髓), 오관(五官) 즉 귀·눈·입·코·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인체 외부의 자연환경이란 계절의 변화(春·夏·秋·冬), 오기(五氣:風·暑·寒·濕·燥), 오색(五色:靑·赤·黃·白·黑), 오미(五味:酸·苦·甘·辛·鹹) 등을 가리킨다. 한방의학에서는 이러한 체내·체외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들을 오행의 고유한 특성에 맞추어 분류하고, 그 속성(屬性)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을 각각 오행에 배속시켰다. 오장을 예로 들면 간(肝)은 목(木)에, 비(脾)는 토(土)에, 심(心)은 화(火)에, 폐(肺)는 금(金)에, 신(腎)은 수(水)에 각각 배속시킨다. 인체를 오행과 결합시키는 데는 오장을 위주로 하고, 이를 통해서 육부·오체·오관·오색 등과 결합시키며, 여기에 일련의 관계가 형성된다. 즉, 일례를 들면 봄철과 간(肝)은 목(木)이므로 이 관계에 의해 담(膽)·목(目)·근(筋)·산(酸)·청(靑)·풍(風)·생(生)과 일련의 발전과정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오행에 연관지어진 계절의 변이를 통해서 오기의 변화와 발전과정, 그리고 오미·오색 등을 결합시켜 이들 자연현상과 속성을 인체의 오관에 비유하고 있으며, 다시 육부·오체 등을 연결시켜 자연 현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체 장기(臟器) 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계통적으로 해석·관찰한다. 간에 관해서 좀더 설명한다면 간은 담과 표리관계(表裏關係)이며, 심장과 상호자생의 관계에 있다(木[肝]生火[心]의 관계이므로). 한방의학에서는 이렇듯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제약(制約)과 화생(化生)의 작용을 운용함으로써 장부(臟腑) 사이의 생리적인 상호협조와 제약관계 및 그 평형현상을 설명하며 또 장부의 병리변화(病理變化)를 추정·해석한다. 따라서 오행설은 질병의 한방적 치료 및 진단에 중요한 준거이론(準據理論)이라 할 수 있다.


訓誥學

언어(言語)를 연구함으로써 문장을 바르게 해석하고 고전(古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학문. 중국의경서(經書) 연구로부터 일어났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漢)·당(唐) 및 청대(淸代)의 훈고학을 일컫는다. ‘訓’은 언어라는 뜻, ‘誥’는 옛 언어를 말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전은 어려워지게 마련이지만, 특히 중국에서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BC 213∼BC 212) 사건과, 한초(漢楚)의 흥망(BC 209∼BC 202), 그리고 진(秦)에서 한초(漢初)에 걸쳐 한자(漢字)의 일대 변혁이 있어 짧은 기간 동안 문학상의 큰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한 시대 전의 서적을 읽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게 되어, 전한(前漢:BC 202∼AD 8)에서는 1경전문(一經專門)의 훈고학이 생겼다. 《시경(詩經)》의 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아(爾雅)》는 자전(字典)의 원시적인 것으로서 문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서이다. 후한(後漢:25∼220)에서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져 마융(馬融)·정현(鄭玄)·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한의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집하므로(640) 일단 큰 성과를 올렸다. 그 후 유심적(唯心的) 경향이 강한 송학(宋學)의 유행으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청(淸:1644∼1911)에 이르러는 서양과학의 영향도 받게 되어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이 일어났으며, 한학 부흥을 목표로 내걸었다. 청의 훈고학 특징은 《설문해자》를 기초로 하는 소학을 존중한 점에 있으며,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왕염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유월(兪)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董仲舒(BC 170?∼BC 120?)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 허베이성[河北省] 광촨현[廣川縣] 출신. 일찍부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익혔으며 경제(景帝) 때는 박사가 되었다. 장막(帳幕)을 치고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도 있었다. 3년 동안이나 정원에 나가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획(參畵)하게 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儒家)에 통일된 것은 그의 헌책(獻策)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뒤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였다. 저서에 《동자문집(董子文集)》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性理學

중국 송(宋)·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극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이기설】 이기설은 우주·인간의 성립·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화·목·금·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기 양자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심성론】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늘의 도리는 음·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의(義)라 하여, 비록 천·지·인의 삼재(三才)가 음양·강유·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성경론】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성(誠)·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의의 인식 파악은 성·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한국】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정몽주·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하륜(河崙)·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오행·만물·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가 주창하였고 주희(朱熹)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을 확인하였다. 그 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다.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朱子(1130∼1200) 처음으로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깃?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나 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

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四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의 네 가지 경서. 《대학》과 《중용》은 원래 각각 《예기(禮記)》 속의 한 편(編)이었으나, 유교 교설의 뛰어난 개론으로서 주목되어 주자(朱子)가 그것을 빼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부르고, 사서야말로 공문(孔門)의 사제전수(師弟傳授)의 도통(道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가 여기에 베푼 주석 가운데 《대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注)》 《맹자집주(孟子集注)》 《중용장구(中庸章句)》는 그의 다른 여러 주석과 함께 신주(新注)로 불리며, 한(漢)·당(唐)의 고주(古注)에 비해 새로운 학문의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唐) 이전의 오경(五經)을 대신해서 주자 이후에는 사서가 유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유행되어, 나중에 한국에서는 사서오경이라 하면 중국의 고전 및 문화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졌다.


陽明學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송대에 확립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考證學 처음으로

중국의 명(明)말~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Q)·호위(胡謂)·모기령(毛奇齡)·만사대(萬斯大)·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훈고·수학·천문학·지리학·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公羊學

구경(九經) 가운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시하여 연구하는 학문. 서한(西漢) 초기에 생긴 금문학파(今文學派)는 공자(孔子)를 정치가로, 그가 편성한 육경(六經)을 공자의 정치이론서라고 생각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춘추공양전》에 그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서한의 대학자 동중서(董仲舒)와 공손룡(公孫龍)이 중심이 되어 이 공양학을 창설하였다. 또 중국은 하나라는 사상인 이른바 대일통(大一統)사상이 공양전 속에서 강조되자, 이 학문 정치에 큰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한나라 무제가 정치이론서로 선택하고 또 공손홍을 승상으로 등용하자 공양학은 매우 번창하였다. 후한(後漢) 때는 학자 하휴(何休)가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 《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을 지어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 학문이 극성기를 맞은 것은 청(淸)대였다. 청대에 강소(江蘇), 절강(浙江)지방에서 이 학문이 다시 번창하여 장존여(莊存與)와 장유가(莊有可) 등이 상주학파(常州學派)를 결성하여 정치이론학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청말엔 추평(平)·캉유웨이[康有爲]·담사동(譚嗣同)·양계초(梁啓超) 등이 공양학을 정치이론으로 크게 발전시켰다. 또 1891년에 캉유웨이가 간행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는 고문파의 경학을 호되게 비판한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집대성으로 평가된다.


變法自彊運動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개혁운동.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청·일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讀書人層)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헌법제정, 국회개설, 과거제(科擧制) 개혁과 양식학교(洋式學校)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고, 주요도시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하여, 관료나 독서인층을 대상으로 계몽·선전활동을 펼쳤다. 외국인 선교사와 일부 고관들 중에도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관들의 후원으로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의견을 구신할 기회를 얻었다. 황제는 그의 의견에 공명하여 량치차오·담사동(譚嗣同) 등 변법파(變法派)를 등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西太后)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망명하였다.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立憲)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淸朝打倒)·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孫文] 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다.